피란지도

《피점란: 피란지도》(2025)
민족의 역사적 애환의 색채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피란' 이라는 두 글자에 예술가들의 고유한 창작점을 찍어 '파란'으로 완성하는 과정을 지도 위에 기록해 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저마다의 점들은 시퍼런 멍애가 스며든 파란을 보듬기도, 보다 밝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파란을 꿈꾸기도 한다.
제 1장: 만화유희: 접점(接點)
만냥이아트패밀리 (남정훈, 김태영, 김혜원, 보영, 안나보니따)
2025년, AI가 인류의 창작활동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라 누구나 예상했음에도, 막상 스마트폰 하나로 일본 만화 거장의 화풍을 손쉽게 카피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자 전인류는 크게 기뻐하고 분노했다. 이는 그 화풍의 원작자가 만화라는 영역에서 지대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만화라는 분야가 전 인류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누구든 자신만의 표현수단이자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분야임을, 그리고 그 분야에 너무 쉽게 발을 내딛으려는 전 인류의 (당시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던 욕망의 표출을 노골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법리적으로든, 그들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도의 적'으로든, 당시 전 인류가 동참하고 있는 그 하찮은 유행이 결코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하지만 만화는 오직 그러한 미(美)의 치장을 똑같이 따라 한다 하여, 그 분야에 온전하게 빌을 내디뎠다 볼 수 있는 예술은 결코 아니다. 되려 당시에 전 인류가 자신의 그림을 카피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만화 거장은 그 누구보다 인간의 추(醜)를 직시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기본적으로 만화는 풍자와 유희 두 가지 특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일반적인 미를 좇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데, '만화유희: 접점'은 유희적인 측면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그 독특한 필체를 선보이려 한다. 본 전시《피점란: 피란지도》에 참여한 만냥이아트패밀리는 지역의 피란유산을 만화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AI시대 전인류가 그토록 길망했던 화풍 훔치기의 역행으로서, 가만히 있어도 입에서 쌍욕 튀어나올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지역을 탐방하며 몸소 체험해야 했던 작가적 진실성을 증명한다.
그 과정은 만화가와 그들이 창작하게 된 피란유산과의 일종의 관계 맺기와도 같았다. 만화가는 만화적 상상력과 개성을 통해서 민족의 아픔 같은 것을 대중에게 적당하게 소개할 용도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구에 응답하기도 해야 하는 엔터테인의 최전선인 웹툰 산업 내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생존했던 그들은 청각적인 장치를 통해서 어느 한 분야에 정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가적 개성을 뽐내며 지역과 자유롭게 유대한다. (기획자가 이러니 저러니 말은 많지만 만화가 남정훈, 김태영, 김혜원, 보영, 안나보니따의 작품 속 피란유산이 어떻게 표현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원하든 원치 안 든 손 끝에서 운을 떼어버린 그들의 창작물은 전시가 오픈이 되기 전까지, 기획자가 작품을 제출하라고 독촉을 하다가 지쳐 몸져누울 때까지 그 행방을 일 도리가 없다) 만화는 늘 익살스럽다.
제 2장: 원시소리: 구심점(求心點)
타무라 료
음악이 아닌 소리를 수집하는 작가들의 창작 과정은 낯선 장소에서 소리의 주파수를 강렬하게 감지하는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노력은 최종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며, 타무라 료는 소리예술에서 기술적 메커니즘이나 복잡한 프로그래밍보다는 소리 자체의 고유한 형태에 집중한다. 본 전시의 제작 과정은 타무라 료에게는 새롭고도 익숙한 장소인 부산의 소리를 수집하고, 자신의 내면 '시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타무라 료는 2023년부터 전시 기획에 참여했으며, 일본을 떠나 오랫동안 서울에서 작업하다가 부산에서 녹음기를 들었다. 그는 부산의 피란유산 9곳을 탐방하며 지역의 소리를 조사했다. 아미산 비석마을에서 일본 비석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전시는 그의 순수하고 호기심 어린 미소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의 소리 환경은 과거와 다르지만, 타무라 료와 같은 진정한 작가의 작품은 시대가 변해도 고유한 점을 찾아 다른 차원과 연결하는 타고난 직감을 지니고 있다. (기획자가 말하길, 타무라 료는 정글북의 모글리 같다고 한다)
타무라 료의 작품 <블루, 부산>은 7채널 스피커 시스템을 활용한다. 부산재한유엔기념공원에서 수집한 소리가 베이스가 되어 전시장 중앙의 메인 2채널 스피커로 재생되며, 제 1장 '만화유희: 접점' 참여 작가들이 제작한 피란유산 관련 5채널 사운드 디자인이 보조 요소로 더해진다. 또한 제 3장 '파란편지: 결점'의 미디어 작품을 위한 배경음악도 사용된다. (타무라 료가 말하길, 자신의 작품은 '밥그릇'이고 다른 참여 작가들의 작품은 '밥'인데, 자신의 그릇이 밥을 더 맛있게 보이게 한다고 한다) 전시 공간을 떠다니는 소리의 흔적들은 서로 다른 피란 이야기들을 하나의 소리로 융합시키며, 보이지 않는 사고의 점들을 모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타무라 료, 당신의 작품은 최고의 '고봉밥'이다!)
제 3장: 파란편지: 결점(缺點)
연출: 오승진 출연: 이원빈, 임은욱, 황가은, 서승수
'피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쟁 시절의 피난민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지역 쇠퇴와 현실 도피를 꿈꾸는 청년들의 불안으로 확장해 본다. 과거 전쟁의 형태와는 다르지만, 오늘날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청년들의 모습 역시 일종의 '피란'이다. (사실 어디로 어떻게 도망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잿빛 가득하고 고리타분한 지역을 탈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막연한 불안은 청년들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며,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불확실성이 아니다.
본 파트에서는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다큐멘터리 <잔상과 거울>로, 부산에서 웹툰 작가로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아가는 가은과 부산을 떠나 수도권에서 IT 업계에 종사하는 서승수를 다룬다. 두 번째는 비디오 에세이 <블루 레터>로, '피란유산'이라는 거창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퇴락해가는 아미동 비석마을을 관찰한다. 이 작품에는 청년문화 기획자 이원빈과 꾸준한 연기 활동으로 부산 지역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배우 임은욱이 출연한다. 네 명의 청년이 쓴 '파란 편지'가 지역의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다를 바로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청년의 기운이 반짝이는 특정 이온음료처럼 상쾌한 느낌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웃음)
(기획자가 타무라 료의 <블루, 부산>을 전시 공간 전체에 틀어놓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비디오 에세이 <잔상과 거울>의 별도 오디오 청취가 무의미해졌고, 작가들은 타무라 료의 오디오에 맞춰 작품을 컷 편집해야 했다. 작가들은 타무라 료의 소리의 힘을 이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존심이 훼손된 채로 타협해야 했다. 이처럼 청년 작가들이 항상 선배 작가의 영향력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이 현대 청년 작가들의 공통된 고민인지 묻는다. 하지만 이는 아마도 기획자의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선배 세대의 위상과 존재감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위치를 공고히 한다. 청년이라는 명찰 떼어버리고 청년예술하고 싶다.)
제 4장: 피란지도: 원점(原點)
포스터: 보영, 김태영, 오승진 / 웹페이지: 서승수, 오승진
전시의 부제 '피란지도'는 단순히 방문객들을 부산의 피란유산 위치로 친절하게 안내하기 위한 단어의 조합이 아니다. 이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길 위에서 파편화된 시간을 수집하는 '기록자'들이며, '오만함'을 우선시하는 예술 전시의 '허영'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피란지도'는 주체적 삶의 과정과 방향을 담은 용어로, 필연적으로(아마도 우연히) 지역에 남아있는 과거 피란유산에 시선을 던지고, 동시대의 다른 형태의 피란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장하며, 궁극적으로 현재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도 위의 '기록 점'들은 거대한 유형의 역사적 유산부터 우리 삶 속 무형의 기억까지 다양하다. 이 점들의 형태와 의미가 때로는 불명확하거나 모호할 수 있지만, 기록자들이 꾸준히 점을 찍고 모여들면서 그 의도는 점차 명확해진다. 관련 웹페이지는 단순히 제작자들의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또 다른 진화하는 창작물(그들 자신을 위한 '기록 좌표')로 봐야 한다.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증명을 위한 투쟁이 아니며(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 덕목으로 정의될 수도 없다), 전시는 이전에 거부했던 '그리 사소하지 않은 허영'에 빠져든다. 《피점란: 피란지도》는 만화이고, 소리이며, 이 시대 청년의 생명력 그 자체로, 역사적 인식을 촉구하지 않는 전면적 콘텐츠를 대표한다.